국철 1047명 해고철회투쟁의 16년
200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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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鐵1047名解雇撤回鬪爭の16年
국철 1047명 해고철회투쟁의 16년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도로치바) 나카노 히로시 전 위원장 지음
<우리는 철로에 산다> 5장 중 발췌
* 이 기술의 시점은 2003년입니다.

한 마디로 16년이라 해도 그것은 지극히 역동적인 공방의 16년이었습니다. 1987년 4월1일 국철이 해체되어 JR이 발족하면서 지금까지 큰 고비, 관문이 세 번 있었습니다.
첫째는 90년 4월1일로, 국철청산사업단으로부터 해고된 1047명의 국철투쟁이 시작된 날입니다. 권력과 JR, JR총연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94년 12월24일로, 무라야마를 수상으로 하는 자민당-사회당-사키가케 연정의 가메이 시주카 운수대신(장관)이 국노(국철노동조합=고쿠로)에 대한 202억 엔 손해배상소송을 철회한 날입니다. 권력의 자세가 ‘힘에 의한 국노 해체’ 에서 ‘포섭’으로 변했습니다.
셋째는 98년 5월28일로, 도쿄지법이 1047명 문제에 관한 노동위원회명령을 전적으로 번복하는 극히 반동적인 판결을 내린 날입니다. 권력의 자세가 다시 힘에 의한 국노해체노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2000년 5월30일의 ‘4당합의’까지 계속됩니다.

1.국철청산사업단의 3년

87년 4월1일, JR에 채용되지 못한 (소속 조합 때문에 채용차별을 받은) 국철노동자는 정확하게는 7628명이었고 대부분이 홋카이도와 규슈의 국노조합원이었습니다. 그들은 각지에 설치된 국철청산사업단 고용대책지소(支所)로 내보내졌고 3년 동안의 기한부로 “재취업을 알선한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매일 좁은 방에 앉아만 있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아예 명목적인 열악한 재취업 자리만 소개한 채 방치해서 결국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야 되었습니다. 정권과 국철청산사업단의 속셈은 3년이 지나면 모두 싫증나서 그만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철분할민영화 시점의 ‘잉여인력’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단 한 명의 해고도 없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노동자가 생활상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JR 이외에 재취업을 결단하기도 했고, 아니면 홋카이도, 규슈에서 혼슈의 JR로 광역채용에 응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90년 3월이 가까워지면서 수천 명 규모의 노동자가 어디까지나 ‘해고철회, 연고지의 JR복귀’를 요구하면서 청산사업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배경에는 국노가 이 문제를 두고 유일하게 진행한 투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노동위원회투쟁에서 88년경부터 각 지방 지노위에서 잇따라 조합 측 완전승리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채용차별이 국가적 부당노동행위임을 인정하고 원직복직을 받아들이라는 국노 측의 제기에 대해 JR은 “비록 부당노동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철이 했던 것이지 별도 법인인 새 회사 JR에는 책임이 없다”는 오만한 태도로 일관하며 노동위원회 그 자체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지노위의 심리에서는 조합 측 주장만이 일방적으로 진술되었고 반대의견 없이, 당연한 일이지만, 조합측이 완승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청산사업단에 보내진 노동자들을 크게 격려한 것은 사실입니다.
국노본부의 대응은 어디까지나 90년 3월까지 청산사업단의 노동자를 재취업하도록 하려는 것이며 혁동(일본공산당계열의 현장조직)과 사회주의협회파(사회당계열의 현장조직) 등은 88년쯤부터 “이대로라면 (즉 청산사업단에 아직 수천 명이나 노동자가 남아 있는 상황이라면) 곧 최종적인 해고가 될 것”이라며 위기감을 부추기면서, 특히 혁동은 자기 조합 활동가들을 홋카이도와 규슈에서 혼슈로 광역채용을 응하도록 하는 방침이었습니다. 그래도 집 사정 등으로 자기 연고지를 못 떠나는 노동자들이 많이 남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국노본부가 89년 6월 임시대회에서 내놓았던 것이 ‘전면일괄해결요구’ 노선입니다. 오늘까지 국노가 매달리고 있는 화해노선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지노위에서 완승했다는 유리한 정세인데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국가적 부당노동행위와 투쟁하자는 것이 아니라 “채용차별문제에서 파업권파업시의 202억 엔 손해배상문제까지 합쳐서 중노위에서 화해 해결하자”는 노선이었습니다.
거기에다 90년 4월이 눈앞에 다가오자 사회당의 다나베 서기장과 자민당, 노동대신(장관), 운수대신이 “일단 JR에 복직한 뒤 같은 날짜로 퇴직한다”는 탄광노조 미이케 투쟁 때의 ‘후지바야시 알선안’과 같은 내용으로 화해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JR동일본회사의 담당자는 “국노는 아마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교섭을 아예 날려버린 것이 90년 3월 동노지바(국철동력차노동조합=도로치바)가 앞당겨 벌인 84시간 파업이었습니다(72시간 파업 계획을 한나절 앞당깄다). 그 결과로서 4월1일자로 청산사업단으로부터 1047명이 해고되었고 바로 이 시점에서 1047명 투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2.국철투쟁의 시작과 JR총련의 대분해

1047명이 90년 4월1일의 관문을 돌파한 것은 JR체제, 국철분할-민영화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사태였습니다. 가장 격심하게 반응한 것이 JR 총련입니다. 자민당이나 사회당 등은 그동안 4자리 수 노동자의 해고라는 사태를 몇 번째의 광역채용으로 해소하려고 했지만, 이에 대해 JR총련이 “정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버티면서 이익을 보려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떠들면서 노동자 해고를 요구하는 ‘총궐기 집회’까지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열었습니다. 그리고 마쓰자키(JR총련-가쿠마루파의 두목)는 “만약 청산사업단의 노동자를 조금이라도 재고용한다면 파업으로 맞서겠다” 등 이성을 잃은 소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음해 91년 초에는 JR서일본노조 위원장이 JR총련에 대해 ‘절연 선언’을 내고, 서일본, 도카이, 규슈, 시코쿠, 그리고 하코네부터 서쪽의 JR총련 산하 단위노조가 잇따라 JR총련을 탈퇴했고, 92년 5월에는 JR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JR노동운동은 여전히 동일본, 홋카이도, 화물을 장악하는 JR총련과 하코네에서 서쪽을 장악하는 JR연합, 그리고 투쟁단(해고자 조직)을 껴안은 국노, 이 3자가 각각 맞서는 상황에 돌입했습니다.
국철분할민영화는 결국 국노를 중심으로 한 국철노동운동을 근절하려는 공격이었습니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으로 등장한 것이 옛 동노 가쿠마루파를 중심으로 한 JR총련이었습니다. 동노-가쿠마루파는 애초 자민당과 긁은 관계를 갖고 있었거즌요. 국가권력이든 자민당이든 JR자본이든 JR 출범 후에 원했던 것은 ‘1기업 1조합’, 즉 JR총련을 이용한 전적 노동자 지배였습니다. 그러나 국노 슈젠지 대회에 뒤이은 90년 4월 1047명투쟁 출발은 이 JR총련을 공중분해시켜 정권이 그려온 노무정책의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했습니다.

3. 202억 엔 소송문제와 국노 포섭 기도

이 가운데 다음의 큰 전기가 된 것이 94년 12월 가메이 시즈카가 했던 202억엔 손해 배상소송 취하였습니다.
90년대 들어 1047명의 공방 무대가 중앙노동위원회로 넘어갔습니다. 국노는 지노위 완전승리를 얻어낸 것이라 당연히 중노위 즉각 정당한 명령을 요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국노는 집요하게 89년 ‘전면일괄해결요구’노선에 따라 중노위에서의 화해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중노위는 계속 미루었지만, 93년 12월에 들어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자 홋카이도와 오사카의 채용차별사건에 관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JR에 당사자책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즉, “국철과 JR은 다른 법인이기 때문에 부당노동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JR은 관계없다”라는 JR측 주장은 배제하면서도) 부당노동행위의 성립 그 자체에 관련해서는, 오사카의 2명에 대해서는 부정하였습니다. 홋카이도의 경우 1700여 명이란 막대한 심사신청인의 일부에 대해 부당노동행위가 성립함을 인정하면서도 채용범위는 JR의 ‘공정한 선고’에 맡겨진 사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국노본부는 정치화해노선으로 선회하고 그 연장선에 94년 12월의 소송취하가 있었습니다.
202억엔 손해배상소송이란 75년 파업권 파업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자민당의 압력으로 국철당국이 국노와 동노를 상대로 제기한 것인데 동노에 대해서는 국철분할-민영화의 앞잡이가 된 대가로 86년 8월 취하했습니다. 그리고 그 금액을 포함한 전액이 국노에 떠맡겨졌습니다. 오랫 동안 재판이 계속되었는데 95년 봄에는 판결이 예정되었었고 거의 국노측의 패소가 확실시되고 그 경우에는 20년간의 이자를 합쳐서 국노가 400억 엔의 손해배상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국노회관을 포함한 국노의 모든 재산이 압류당할 것이 확실했었고 국노에게는 존망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202억 엔 문제는 명백히 가메이 운수장관의 기도였는데, 이 기도는 요컨대 JR총련을 이용해서 힘으로 국노를 해체하려는 기존 방침을 유보해서 국노를 포섭하려는 것이었습니다. 202억 엔의 송해배상소송을 철회하는 대신 국철 1047명투쟁을 일정한 수준에서 해결시키고 끝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몇백 명이 JR에 채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었습니다.
하코네를 경계로 동서로 분열한 JR총련은 이 과정에서 가쿠마루적 파시스트성을 드러내면서 마구 발버둥쳤습니다. 그리하여 JR총련은 하코네 서쪽 JR자본에게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권 핵심의 눈에도 용인할 수 없는 존재로 비쳤습니다. 202억 엔 취하안은 결국 정권 핵심이 JR총련을 벌이고 그 대신 국노를 포섭하면서 내부로부터 변질시키려는 방침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4. 화해결착기도를 JR 각 회사의 거절

당연히 이에 대해 JR총련이 거세게 반발해서 ‘국노가 가메이에게 비밀헌금을 했다’ 등의 낭설을 대대적으로 퍼뜨리거나 국노를 ‘가메이조합’이라고 부르면서 자기 조직 내의 모순을 전가하느라 애썼지만, 이는 반대로 JR총련 내에서, 특히 그 최대 거점인 JR동노조 내에서 비(非)가쿠마루 분자의 동요와 이반을 촉진하였고, 그 결과 95년 말까지 니가타를 중심으로 한 옛 철노 계열의 분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96년 들어 당시의 JR동노조 위원장이 실은 반(反)마쓰자키, 반 가쿠마루의 수모자임이 드러나는 가운데, 가쿠마루가 일련의 열차방해 등을 이용해서 ‘정권의 모략’론을 펼치는 등,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러나 가메이의 기도가 이러한 JR총련?가쿠마루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아닙니다. 최대의 문제는 JR 각 회사의 대응이었습니다. 가메이는 당시, JR 각 회사의 사장들을 만났는데, JR서회사도 JR동회사도 차이없이 모든 사장들이 가메이가 제안한 화해해결 (1047명중, 일정수의 JR 채용을 포함함)을 한결같이 거부했습니다. 가메이가 분노해서 JR동일본 마쓰다 사장에게 “당신 가쿠마루냐”고 물어봤더니 마쓰다가 “아니, 가쿠마루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에 다시 가메이가 “가쿠마루와 사이 좋게 지내는 놈들이 다 가쿠마루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어쨌든 이 시점에서 정권 측이 기도한, 국노 포섭(그 이면에서 JR총련 버리기) 노선에 의한 1047명 문제 해결은 무엇보다 JR자본이 거절한 결과 무산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국노본부는 “이 기회를 놓치면 큰일이다”는 듯이 점점 굴복해 갑니다. 86년 8월30일 국노가 낸 JR 각 회사에 대한 요청은 “국철개혁법에 따라 추위되고 있는 현상을 승인”이라는 표현으로 국철분할민영화를 정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명백한 노선 전환이며 가메이의 202억엔소송 취하에 대한 국노 측의 답이었습니다. 동시에 중노위 명령 이후 채용차별사건을 심리중인 도쿄지법 재판 역시 97년 5월에는 마무리되었고 이 시점에서 JR, 국노, 중노위, 청산사업단 등의 관계자들에게 화해권고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JR 각사가 일관되게 거부함으로써 이 정치화해 기도가 무산되었습니다.(손배소송 자체는 국노회관을 국철청산사업단에 반납함으로써 취하되었음.)

5. 98년 5.28 도쿄지법 반동판결

98년 5월28일의 나온 채용차별사건에 대한 도쿄지법 판결은 이러한 국철문제를 둘러싼 경색 상태를 반동적으로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판결이 두 개 재판부에서 나왔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되 양쪽 다 노동위 명령을 전면 부정하는 극반동 판결이었습니다. 특히 한 쪽은 JR의 당사자책임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앞서 제시된 화해권고에서 JR을 당사자로 간주한 법원의 자세와도 상반된 판결로, 한 마디로 노동3권을 보장한 헌법 28조보다 국철개혁법을 더 고위에 둔 판결이었습니다.
“좋은 판결이 나올 것이 틀림없다”며 환상을 부추기던 국노본부와 국노 변호단, 협회파, 혁동도 이 판결로 좌절하게되었습니다. 국노는 이 반동 판결에 분노해서 반격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96년 8.30노선전환의 연장에서 전면 굴복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98년 8월 국노 대의원대회에서는 미야사카 서기장이 갑자기 ‘보강 5개항’을 내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국철개혁법 승인', ‘부당노동행위 제소 취하'에서 ‘국노 명칭 및 조직 형태의 검토’까지 포함한 것으로, 이 대회에서는 통과될 수 없었지만 다음해 3월 임시대대에서 국철개혁법 승인을 강행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2000년 5월30일 등장한 것이 ‘4당합의’입니다. 4당합의란 여당 3당 (자민, 공명, 보수)과 사민당의 합의입니다. 그 핵심이 “국노가 ‘JR에 법적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서 이를 대대에서 승인하라”는 것으로서 결국 98년 5.28도쿄지법판결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직후에 열렸던 7.1 국노 임시대의원대회에서는 투쟁단과 그 가족의 분노가 터져서 연단 점거로 대회진행이 중단되어 4당합의 승인이 저지되었지만 국노본부가 계속해서 8월과 10월에 잇따라 대회를 열어, 2001년 1월27일 임시대대에서 경찰기동대가 대회장을 에워싸고 있는 황당한 상황에서 강행처리되었습니다.
그러나 4당합의에서 “JR에 법적책임이 없다는 것을 대회에서 인정하면” “인도적 관점에서” “고용 확보 등을 검토”하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이 더욱 더 조건을 높이면서 이번에는 “아직 국노 내에 4당합의 반대파가 있으니까 안된다”고 생트집을 잡았고, 이에 끌려간 듯이 국노본부가 2002년에 들어 ‘4당합의’를 끝까지 반대하는 투쟁단원을 제명처분하기 위해 사문위원회를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5월27일 국노 임시대대에서 전투적인 투쟁단을 사문위에 회부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5.27 임시대대 사태를 막기 위해 대의원 숙소에서 전단 배포, 설득활동을 벌였던 국노 조합원 10명을 뒤늦게 10월 경찰청이 체포했고(10월) 그 중 8명을 기소했습니다. 8명이 체포된 지 10개월이 되도록 아직 구속되어 있습니다.(이 8명은 2003년 12월 보석되었고 2006년 12월 현재 재판 진행중.)
4당합의 그 자체는 2002년 12월에 들어 결국 국노 내에 뿌리 깊은 반대세력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자민당, 공명당, 보수당 등 여당 3당이 이탈을 밝히면서 완전히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정권이 한층 더 흉포해지면서 바로 유사(有事)체제 하의 노동운동 대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으로 국철투쟁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국철투쟁은 분할-민영화부터 16년을 거쳐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동노지바 16년간의 투쟁

동노지바가 현재 한 500명 정도의 작은 노동조합입니다. 그러나 동노지바는 분할민영화 때 두 단계 파업을 해냈고 JR 체제하에서도 투쟁을 계속하면서 조직의 단결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국노는 4당합의가 무산된 지금, 본래는 4당합의 반대파가 조직의 주도권을 잡아야 마땅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4당합의가 파기되어 찬성파도 반대파도 전망을 잃어버렸고 2003년 9월 정기대대를 앞두고 국노는 바로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노를 오늘까지 국노답게 만들어 온 투쟁단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남편이 나쁜 짓을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런 처사를 당했다”고 하소연만 해도 솔직히 안 됩니다.
국노에 없는 것은 JR자본과의 투쟁이며 국가권력과의 투쟁입니다. 자본주의 하의 노동조합으로 존재하는 한 자본과의 화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화해노선은 안 됩니다. 투쟁을 통해 사업장, 지역, 산별, 그리고 전국적인 계급적 힘관계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 노동자가 전진할 수 없고, 아무런 성과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이 마땅한 일을 지금이야말로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국철-JR노동운동은 JR동노조의 분열소동도 포함해서 다시 전국난세(戰國亂世)적인 양상을 깊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금의 전쟁과 대량실업의 시대에 있어서 이제 전국의 수믾은 노동자가 총평(*) 노동운동을 넘어서는 계급적 노동운동의 재구축을 원하고 있습니다. 국제 계급투쟁의 새로운 고조가 일본 노동자 인민의 계급적 각성을 급속히 촉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이하 동노지바 16년의 투쟁과 그 교훈에 대해서 약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50년 이후 일본의 좌파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1. JR체제 하의 새로운 투쟁의 축

동노지바는 분할-민영화를 반대해서 두 단계 파업에 나서 28명이 해고되었습니다. 그리고 12명이 채용차별로 청산사업단에 보내졌습니다. 본부와 현장의 핵심적인 활동가들이 모두 해고되어 40명의 해고자가 생겼습니다. 특히 쓰다누마와 지바운전구 등 파업 거점이 된 지부에서 활동가들이 쫓겨났기 때문에 대단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재정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노동조합 조직은 본부가 있고 지부가 있고 거기서 활동가와 임원이 일상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조합원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조합원의 요구를 수렴하고 조합의 여러 행동에 참가하는 체제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이끌었던 활동가들이 40명 해고된 것이라 대단한 타격이었습니다.
해고자 40명은 각각 아르바이트에 나가거나 물건판매 사업으로 나갔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현장에서 40명의 활동가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그 후 노조가 새로운 집행체제를 구성하자 자본은 그 사람들에게 다시 전보발령을 냈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가 쓰다누마 지부였고 지부 집행부 3명 모두가 지바운전구에 전보되는 처사까지 당했습니다. 다시 집행부를 구성하다보니 이것도 전보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본부는 해고자가 임원이 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지부의 집행체제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각 지부 조합원들이 열심히 해주어서 각 지부의 체제를 잘 구성했습니다. 이것이 동노지바가 이 큰 난국을 넘어갈 수 있었던 최대의 힘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87년 4월, JR이 출범했습니다. 이만한 상처를 입었으니 원래 상처를 아무는 시간이 다소 필요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해서 당시 조합원들에게 “좀 온천에나 가서 쉬자”라는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그러나 적의 공격이 그것을 허용해주지 않아서 결국 곧 투쟁으로 돌입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동노지바가 어떤 투쟁을 할까 해서 몇 가지 축을 세웠습니다.

- 분할민영화 반대투쟁을 이유로 한 28명 공노법해고(*)와 국철개혁법 12명 채용 차별과의 투쟁
하나는 분할민영화 반대투쟁 때문에 공노법으로 해고된 28명, 그리고 국철개혁법으로 채용차별이라는 부당노동행위를 받고 해고된 12명, 이 해고를 철회시키는 투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해고철회 투쟁에 나선다는 것은 재판이나 노동위원회 투쟁 등이 있기도 하지만 재정적인 기반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니까 전국에서 물건판매 투쟁을 벌이는 것을 포함해서 조합원들이 하나가 되어 해내자는 것을 큰 축으로 세웠습니다.
(* 공공기업체에서의 파업을 금지한 <공공기업체 등 노동관계법>에 따른 해고)
공노법해고의 28명은 해고된 시점에서 재판투쟁으로 들어갔고 청산사업단으로 보내진 12명에 과해서도 바로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애초 “노동위원회에서 복직명령을 쟁취해도 어차피 JR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우선 재판을 시작했는데, 노동위원회 투쟁도 병행하기로 해서 1년 후에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지바 지노위에서는 90년 3월투쟁을 앞둔 2월, 복직명령이 내려졌습니다.

- JR출범 이후의 또다른 조직파괴, 강제전보, 전출, 기관사직 등용차별, 승진 승격 차별, 업무이관, 기지폐쇄 공격 등과의 투쟁
JR출범 이후에도 분할-민영화에 저항한 유일한 조합인 동노지바에 대해서 조직파괴공격이 집요하게 계속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분할민영화를 전후해서 나리타, 가쓰우라, 사쿠라 등 전통 있는 동노지바의 3개 거점 사업장이 폐쇄되었습니다. 모두 자본의 입장에서 보아도 합리적인 이유는 없었습니다. 효율이라는 관점에서는 보면 나리타에 운전구가 있는 것이 낫지만 아직도 나리타에는 운전구가 없고 차장구만 있습니다. 예전에는 200명의 기관사가 있었던 소부선의 거점인 쓰다누마 전차구 역시 굉장히 많은 차량을 보유하면서도 승무원을 수십명밖에 배치하지 않고 아직도 무리한 운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JR자본에게도 비효율적인 운행을 계속하는 것은 모든 체제가 동노지바의 거점 파괴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에 있어서 3개나 거점 사업장을 빼앗기는 것이 큰타격입니다. 그러나 동노지바는 사업장의 폐쇄라는 극심한 공세에 맞서 새로운 단결을 형성하고 새로운 지부를 결성해서 투쟁해 왔습니다.
또, 분할-민영화 이후 16년 동안 일관되게 동노지바 조합원들이 승직과 승진 면에서 차별을 받아 왔습니다. JR로 넘어간 시점에서 기관사 자격이 있던, 당시 22-3세 조합원들이, 지금은 벌써 40세가 되는데 아직까지 기관사로 등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기관사직 등용 문제'는 지바 지노위에서는 이겼지만 중앙노동위원회에서는 계류중입니다. 신규채용으로 들어온 젊은 노동자들이 다 기관사가 되었는데 동노지바 조합원은 아직도 기관사로 등용되지 않았습니다. 운전업무에서 역의 영업 업무로 전보된 조합원도 40명 이상 있고 그냥 방치된 상태입니다.
JR의 기관사는 지도직, 그 위에 주임직이 있는데 동노지바 조합원은 주임직은 압도적으로 적고 다 지도직입니다. 검사계도 마찬가지로 주임직이 단 수 명밖에 없습니다. 동노지바 조합원이라면 승진, 승직조차 전혀 못합니다. 이것과의 투쟁이 두 번째 축입니다.

- JR 출범 이후에도 계속되는 극한적 감원. 반 합리화, 운전보안 확립을 위한 투쟁
분할민영화 과정에서, 1982년에 한 40만명이 있었던 국철노동자가 1987년 4월에는 20만여 명, 즉 절반으로 감원되었습니다. 여객업무가 많아졌는데 노동자 수가 절반이라 그 자체가 상당한 합리화와 노동강화입니다. 여기다 이 16년 동안 더욱 자본주의적 합리화 공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열차의 안전 위기가 심각합니다. 이에 대해 동노지바의 전통인 운전보안투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운전보안투쟁이란 동노지바의 용어인데, 열차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투쟁입니다. 이를 세 번째의 큰 축으로 세웠습니다.

- 격화되는 반동과 침략전쟁에 맞서는 반전 정치 투쟁
네 번째로 이 과정에서 일본정부는 미일안보를 재정의했고 미국이 전쟁을 할 때 일본도 같이 하는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96년 미일안보 공동선언이 발표되었고, 99년에는 주변사태법을 비롯한 신가이드라인 관련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2003년 드디어 전쟁을 하기 위한 법률인 유사법제가 제정되었습니다. 노동관계나 기타 대단히 반동적인 치안탄압법들이 잇따라 나오는 가운데 이를 반대하는 반전투쟁 정치투쟁을 제대로 싸우는 것을 또 하나의 축으로 세웠습니다.

- 총평 붕괴 후 전투적 노동운동의 신조류운동을 창조하는 투쟁
다섯 번째는 총평이 없어진 후, 노동조합이 전체적으로 약화되는 가운데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신조류를 만들자.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공동투쟁 관계를 구성하며 전체 노동운동이 투쟁하는 체제를 만들어 나가자”는 사업입니다.
1998년부터는 간사이레미콘지부와 미나토합동, 동노지바 등 3개 노동조합이 주도하여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전국 네트워크를 만들자! 11.8 전국노동자총궐기집회”를 개최했습니다. 투쟁하는 동지들의 지지와 협력으로 매년 11월에 집회를 개최하면서 2002년 11.10집회로 다섯 번째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여러가지 경위를 넘어서 이제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대동단결이 필요하다는 마음을 담아서 “전국 네트워크를 마들자”고 호소했던 것이었습니다.

- JR과 JR총련 가쿠마루 결탁체제를 타파해서 조직확대를 쟁취하는 투쟁
이 전체를 통틀어 JR동일본에서 JR자본과 JR총련 가쿠마루의 결탁체제라는 이상한 체제를 타파해서 조직의 강화 확대를 시도하는 투쟁을 처음부터 동노지바의 기본적인 방침으로 내세워 투쟁해 왔습니다.

2. 동노지바의 주된 투쟁 (1)

JR체제하에서 동노지바는 이상과 같은 6개의 축을 세워서 투쟁해 왔지만 여기서는 더 구체적으로 몇가지 전형적인 투쟁을 소개드리겠습니다.

- 강제 전보에 대한 첫 파업
JR 출범 이후 먼저 강제전보 문제가 생겼습니다. 역의 매점과 우동집, 우유판매점 등에 조합원들이 강제전보되었기 때문에 88년부터 이에 대한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88년 4월 14차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장기 단계적 파업으로 투쟁한다”는 방침을 결정해서 반격에 나섰습니다.
88년 5월 들어 지바역과 가메이도역, 조시역 등에서 잇따라 파업에 나섰습니다. JR 출범 이후 첫 파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5월20일의 가메이도역 승강장 우유판매점 파업에서는 단 한 명의 조합원의 단 한시간만의 파업인데도 불구하고 경찰기동대, 사복 경찰, 직제 등 총 600명이 승강장과 콘코스를 둘러싸고 지원하러 온 동노지바 조합원 100명을 다 체포하려는 듯한 이상한 탄압태세를 취했습니다. 경시청(도쿄를 관할하는 경찰)의 입장에서는 “동노지바는 지바의 시골에서나 해라. 에도강을 넘어 도쿄까지 왔다니 용서 못해”라는 것이었을 지도 모릅니다(가메이도역은 도쿄에 위치함). 하여튼 매우 증오로 가득찬 탄압태세였습니다.

- 히가시나카노 사고 규탄, JR출범 이후 첫 승무원 파업
그리고 89년 12월5일, JR 출범 이후 처음 본선 운전사가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전년인 88년 12월 중앙선 히가시나카노역에서 추돌사고가 일어나 동노지바 조합원이 아니었지만, 운전사가 죽고 승객도 죽었습니다. 이를 두고 단체교섭을 많이 해 봤지만 지지부진이었고 바로 1년 후인 12월 “히가시나카노 사고 1주년, 운전보안 확립”을 내걸고 파업에 나서 350편의 열차를 운휴시켰습니다.
이 88년쯤, 전국에서 화물열차의 추돌 탈선 전복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습니다. JR화물회사는 자체 선로가 없기 때문에 동일본 지역이면 JR동일본회사에의 선로를 빌려서 화물열차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열차운행지시를 내리는 지령은 동일본회사의 직원이기 때문에 다른 회사의 열차인 화물열차를 잊어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화물열차의 사고가 속출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동노지바가 운전보안 투쟁의 차원에서 파업에 나섰다는 것은 많은 JR 노동자들의 공감대를 이루면서 이 투쟁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역시 노동자는 투쟁을 통해 단결을 다짐합니다. 이를 통해 동노지바는 분할-민영화를 둘러싼 공방에서 받은 큰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 1047명투쟁의 출발을 꾸미는 90년 3월파업
90년 4월의 청산사업단 노동자의 해고를 눈앞에 둔 3월18일, 동노지바는 “노동위원회의 명령을 지켜라. 동노지바 12명의 채용차별자를 JR로 복직시켜라. 해고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며 84시간 파업 태세를 취했습니다. 애초 국노에 발맞춰서 19일부터 21일까지 72시간 파업을 예정했지만, 동노지바 본부 임원을 사업장에 못 들어가게 하든가 쓰다누마 지부에서는 조합 사무실 주위를 함석으로 둘러싸든가 여러가지로 파업 방해를 받아 “정당한 노동조합의 쟁의에 대한 명백한 개입이다”라고 항의해서 12시간 앞당겨서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때 당국은 이때 JR총련 가쿠마루 소속 운전사를 모두 대체요원으로 동원해서 심상찮은 파업 원천봉쇄 태세를 취했습니다. 3월19일의 첫차부터 파업에 들어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첫차부터 파업대응 운행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2시간 전인 18일 정오부터 파업에 들어갔으니 도쿄권과 도쿄-지바 간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소부쾌속선도 엉망이었고, 도쿄권까지 다 멈췄습니다.
JR이 들어서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 파업권이 합법화된 것입니다. 국철시절에는 파업을 할 때마다 해고되거나 처분 당하거나 했는데 JR이 들어서면서 조합이 단결해서 신명나면 언제든지 파업을 할 수 있습니다. 당국도 여기에는 개입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 당국이 여러가지 제한을 가했습니다.
원래 JR이 들어서면서 노동협약이 전적으로 바뀌어서 ‘노사관계에 관한 협정’이라는 종합협약이 되었습니다. JR총련과 국노는 체결했지만 회사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노동조합은 그 머슴이라는 격의 노동협약이기 때문에 동노지바는 체결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단체교섭 때 보통 같으면 단체교섭의 교섭원이 근무를 풀고 교섭을 할 수 있는데 동노지바는 그것을 못 합니다. 불평처리위원회도 동노지바와 JR 사이에는 없고 사업장의 조합 게시판도 없습니다. 지금 해고자가 많기 때문에 지부에 전임자를 두고 있지 않지만 노동협약을 맺지 않으면 전임자마저 둘 수 없는 거죠.
그 ‘노사관계에 관한 협정’에는 파업에 관해서 “며칠 전에 통고해라” “어느 범위에서 파업을 하는가. 언제까지 하는가” 등의 통고의무가 있습니다. 동노지바가 협약을 안 맺었기 때문에 원래는 파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며칠부터 파업을 한다”는 것은 지금도 통고합니다. 그리고 이 통고서에는 반드시 “만약 파업에 부당 개입을 했을 경우에는 전술을 확대해서 대항한다”고 명기합니다. 예를 들어 100명이 파업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것을 200명으로 늘이는 것도 ‘전술확대'이며 24시간 파업을 48시간으로 바꾸는 것도 전술확대입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전술을 확대할 권리가 있다. 당국이 이러쿵저러쿵 말할 도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때는 12시간 앞당겨서 파업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파업에 대해서 당국이 “위법 파업이다”며 2명 정직을 비롯해 총 141명에게 처분을 내렸습니다. 거기에다 “위법 파업으로 인한 손해를 조합이 지불하라”며 2100만 엔 파업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투쟁이 전국을 휩쓸어 당시의 국노본부와 사회당 등의 여러 획책을 전부 다 날려 버렸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90년 4월1일 국철청산사업단이 1047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함으로써 1047명 투쟁이 시작되었다는 큰 의의를 가진 투쟁이 되었습니다. 동노지바의 위력을 보여주었고 국노투쟁단 속에서도 동노지바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이 시기부터 확산되어 갑니다.

- 항상적인 파업 태세 확립
그리고, JR자본의 일상적인 부당노동행위와 여러가지 차별에 대해 반격해 가는 투쟁입니다. 당국과 JR총련 가쿠마루 간의 결탁체제로 마구 공격해 오는 것에 반격하기 위해 96년 항상적 파업 태세를 확립했습니다. 쭉 일방적으로 당하던 것에 대해 어떻게 반격할 것인가 본부도 지부도 열심히 생각해낸 결과로서의 전술입니다.
항상적 파업 태세란 “사업장에서 부당한 일이 생겼을 경우 그 사업장만이 그 다음날부터 모두 파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적이니까 매일 파업을 해도 됩니다. 이를 매년 정기대대가 끝난 뒤 반드시 당국에 통고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항목을 들어 “이러한 일을 했을 경우에는 그 사업장만 파업에 들어간다”고요. 예를 들어 지바운전구에서 무슨 공격이 있었을 경우 지바운전구만 들어갑니다. 춘투처럼, “몇월 몇일부터 몇 시간 파업”이라고 통고하면 회사측이 대체요원 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부당전보나 부당노동행위를 하면 그 다음날부터 파업에 들어간다는 얘기니까 대체요원 태세를 갖출 수 없습니다. 이 항상적 파업 태세를 확립함으로써 동노지바는 강제전보 등을 많이 저지했습니다. 당국도 악랄한 짓을 많이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투쟁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전술을 취하면서부터 현장에서도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 동노지바의 투쟁 (2)

- 동노지바와 1047명 투쟁
그리고 청산사업단 투쟁, 1047명 투쟁입니다. 몇 가지 고비가 있었습니다. 먼저, 1993년 중노위 명령입니다. 동노지바는 지노위에서는 12명이 다 승리했습니다(1047명 중 동노지바 조합원은 12명). 그러나 중노위에서는 “2명만 구제, 10명은 지노위 명령을 기각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왜 10명이 안 되는지 설명이 전혀 없었습니다.
국노에 대해서는 더 심했고 홋가이도에 대해서는 무엇을 명령했는지 의미불명입니다. “JR에게 법적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부당노동행위의 범위에 대해서는 JR의 판단에 맡긴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노도 법원에, 중앙노동위원회 명령을 취소하라는 재판을 제기했지만, 98년 5월28일, 도쿄지법에서 반동판결이 나와 국노에서는 “이제 더 이상 싸워도 이길 수 없다. 지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게 되었습니다.
5.28 반동판결이 매우 중요합니다. 노동조합법에 “부당노동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철개혁법으로 이를 부정한 판결이며 노동위원제도 해체를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민간회사에서는 특히 노동위원회투쟁을 하는 쟁의조합이 많았기 때문에 특히 관심이 컸습니다. 미나토합동이나 간사이레미콘지부와 교류가 생긴 것도 5.28판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적인 부당행위를 정당화하고 노조법- 노동위원회제도를 부정하는 이 판결에 대해 “이것은 철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짓을 인정하면 부당노동행위와 조합 파괴, 해고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위기감과 분노가 3개 노조 공동투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재판은 지금 국노투쟁단에 관해서는 대법원까지 넘어갔고, 전동노 쟁의단(일본공산단계열인 전동노의 해고자조직)에 관해서도 2002년 고법판결이 나와 대법원까지 넘어갔습니다. 전동노쟁의단 고법판결도 엄청난 내용이었습니다. 국노 5.28판결은 “JR에 법적책임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전동노 판결은 “JR에도 책임이 있다”면서도 그러나 ‘국시(國是)’, 즉 국철분할민영화라는 국책을 반대한 이상은 “채용차별을 당해도 부당노동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는 판결이었습니다. 동노지바에 대해서는 어떤 판결이 나올지 모르지만 지금 도쿄고법에서 다투고 있습니다.
중노위명령 이후, 무라야마 내각의 가메이 운수대신(장관)이 202억 엔 손해배상소송 취하를 조건으로 국노에게 일정의 화해조건을 제시한 것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때 국노 측도 아직 마음먹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4당합의를 받아들인다면 이때 하면 되겠죠. 그렇게 하면 400명 내지 500명이 복직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국노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JR회사측이 이 화해에 상당히 거세게 저항한 것은 사실입니다. JR총련 가쿠마루도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 저는 “국노는 202억 엔 소송도 없어졌으니까 이제는 1047명투쟁을 열심히 벌이면 된다”고 말했지만 국노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4당합의 때도 자민당 아마리 부간사장(副幹事長)이 “국노를 못 믿겠다”고 했지만 이는 이 202억 엔 소송 취하를 지칭한 것입니다. 정부에게는 “202억 엔 소송을 취하했을뿐 아무런 이익도 못 챙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정부도 자민당 지도부도 아직까지 “국노를 못 믿겠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노위 반동명령이 나온 직후 국노 내부에서는 아키타지방본부 등을 중심으로 공공연하게 “투쟁단이 짐이다”며 1047명투쟁의 정리를 주장하는 그룹이 등장했습니다. ‘챌린지’그룹입니다. 이 사람들이 95년 봄에도 202억 엔 송배소송 판결을 계기로 반동적으로 봉기해서 국노투쟁단을 정리하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국노 나가타지방본부의 집행부와 가메이 운수장관 사이에서 202억 엔 문제를 둘러싼 타결로 일단은 봉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그룹이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며 98년 5.28판결을 계기로 미야사카 당시 국노본부 서기장 등을 끌어들여 국노 내 주류세력으로 떠오르면서 4당합의 수락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
동노지바는 일관되게 “국노투쟁단이 국철노동운동이 낳은 성과다”라는 입장에서 국노 내의 이런 경향에 강력하게 반대해 왔습니다. 저는 동노지바야말로 국노의 누구보다도 국노투쟁단의 투쟁을 평가해 왔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 28명의 공노법 해고 철회 챙취
동노지바 28명의 공노법해고 철회투쟁에 대해서는 92년과 93년 지바지법에서 1차 파업의 해고자 20명 중 7명, 2차 파업 해고자 8명 중 5명이 해고무효 판결을 쟁취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판결의 전제가 “국철분활-민영화를 반대하는 정치투쟁이며 잘못된 파업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나 해고권 남용이다. 너무나 무자비하다”라는 판결이었습니다. 첫 처분이 해고였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쿄고법에서 다투는 과정에서 95년 2월 도쿄고법이 재판장 직권으로 화해를 제안했습니다. 동노지바는 “화해 전제조건이 어디까지나 전원 해고철회다” 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화해결착의 가능성이 있을 수 없다, 피고인인 청산사업단 측이 해고철회에 응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청산사업단이 우리 예상보다 부담을 느꼈던가 보죠. 9월 들어 청산사업단이 전격적으로 “조합측 조건을 검토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결국 97년 3월 국철노동운동 사상 유례없는 28명 전원의 공노법해고 철회라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만 국철 당시의 해고일 만큼 다투는 당사자가 JR이 아닌 국철청산사업단입니다. 청산사업단에는 복직할만한 사업장이 없고 JR에 복직하기 위해서는 다시 재판을 해야 합니다. 해고자들의 나이와 여러 문제를 감안해서 금전화해를 했습니다. 화해 시점에서의 고용관계 종료를 확인하고 그 동안의 체불임금 해당 금액을 화해금으로 받는 동시에 1차 파업에 대해서 국철당국이 제기한 3600만 엔 파업 송배소송도 취하한다는 내용입니다. 조합본부 건물인 동력차회관 터 역시 국철당국으로부터 청산사업단에 승계된 만큼 철거청구 재판도 제기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것도 포함해서 다 마무리했습니다. 동노지바는 28명 전원의 공노법해고 철회를 쟁취한 것을 크게 평가해서 임시대회를 열고 화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4. 국노 정치해결노선의 문제성

국노는 일관되게 정치해결노선, 즉 화해노선입니다. 무릎을 꿇고 “어떤 조건이든지 다 받아들일 테니 조금이라도 돌려 달라”는 운동입니다. 동노지바는 다르죠. JR에 복직을 요구하고 있으니까 JR과 싸웁니다. 또 전국의 JR의 중심이 되는 회사가 JR동일본이니까 “JR동일본 안에서 싸워서 힘관계를 바꾸지 않는 한 JR복직은 있을 수 없다”라는 입장에서 JR체제와의 투쟁을 핵심으로 한 1047명투쟁을 싸워 왔습니다. 그래서 노동위원회와 재판만에 의존한 투쟁이 아닙니다.
따라서 동노지바가 진행하는 1047명투쟁의 주력은 JR에서 일하는 현직 조합원입니다. 물론 1047명 중 9명(12명 중 3명은 정년퇴직했음)의 동노지바 조합원들도 분투하고 있지만 역시 현직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품판매 사업에 관련해서 국노에 경우 투쟁단원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지원을 요청합니다. 동노지바는 해고자도 하지만 현직 조합원들도 물품구입을 요청하러 갑니다. 조합원들 중에는 밖에 나가기 싫은 사람이 많아서 “다른 사업장에 가서 요청하기가 싫어” “설명을 해야 하니까 곤란하다” “아무 말 안 해도 된다면 갈 수 있다” 등 중얼거리면서도 그래도 요청하러 다닙니다. 이 투쟁을 10여 년 동안 해 오면서 동노지바 조합원들도 이제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국철노동자는 국철 안에서만 살아 왔기 때문에 다른 사업장에 가 볼 필요가 없었거든요. 그 상징이 국노입니다. 그러나 물품판매 사업에서 다른 사업장에 가 보고 많은 노동자들을 만나 보니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조합원들에게 실지교육이 되었습니다. 10번의 학습회보다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노지바는 현직 조합원들이 해고철회투쟁의 주체입니다. “해고자들이 우리의 지도자로서 목을 걸고 투쟁해 준 덕분에 우리가 지금 회사에 남아서 일을 할 수 있다” 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합 지도부인 우리도 조합원들에게 늘 해고철회투쟁의 주첸는 현직조합원이라고 호소해 왔습니다.
반면, 국노의 물품판매도 해고자를 위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지바에서 물품판매를 하면 국노지바지방본부가 매출금의 10%를 빼고 나머지가 투쟁단 재정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합원이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노지바는 다릅니다. 지금도 여름과 겨울이 되면 우선 각 조합원이 2만 엔씩 삽니다. 스스로 사고 그리고 나서 다른 조합이나 노동자한테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자세가 국노와 젼혀 다른 것이죠.
국노는 투쟁단원 한 명 당 한 달에 2만5천 엔의 생활 원조금만큼은 현직 조합원들의 기부금으로 지출하지만 그 이외는 투쟁 단원들은 자체적으로 장사나 물품판매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조합의 희생자구제규칙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국노투쟁단원들은 자립하여 물품판매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거나 각 투쟁단이 회사를 만들어 거기서 일을 하면서 10여년 동안 투쟁하고 있습니다.
동노지바는 현직 노동자의 투쟁이 해고철회투쟁의 주체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쟁의단 9명을 부담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견은 없습니다. 국노 챌린지그룹은 “1047명투쟁만 하고 있으니까 노동조건을 위한 우리의 본래의 투쟁을 못한다”고 하지만, 이런 건 다 거짓입니다. 국노본부는 1047명투쟁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국철개혁법을 승인하거나 ‘4당합의’를 인정하는 등 투쟁을 방해하는 것만 합니다. 해고철회투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동노지바는 이 16년 동안 현장투쟁을 기축으로 하면서 많은 재판 투쟁, 노동위원회 투쟁, 지방선거, 그리고 3개 조합 공동투쟁으로 대표되는 ‘투쟁하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조류 운동’ 만들기, 그러한 투쟁을 열심히 하면서 21세기를 맞이하여 2001년 9.11의 충격적인 반미 게릴라에 직면하고는 동노지바 역시 지금의 상황에서 한층 더 비약해야 되겠다는 입장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환기를 맞이한 국철투쟁

1. 국철투쟁을 둘러싼 총결산 공방

지금, 국철투쟁이 큰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적들의 공격 방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만여 명에 불과한 국노, 파업을 해도 열차가 멈추지 않는 국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국철투쟁에 대해서 정부가 이토록 ‘4당합의’ 등의 공격을 대대적으로 가하는가. 이는 역시 국철투쟁, 특히 국노의 존재를 적들이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사실 일본의 노동조합은 크게 ‘연합’(일보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에 수렴되면서 노사협조가 되어 버렸지만 역사성을 가진 국노라는 조합이 포함되지 않는‘연합’이면 적들이 봐도 부족한 거죠. 예를 들어 국노가 만약 이번의 노동법제 개악을 반대해서 깃발을 올리면 5만 명 10만 명의 노동자가 모일 것입니다. 국노는 유사법제를 반대하는 육.해.공.항만 20개 노조 투쟁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원조합이나 항공련 등에 비해 국노의 존재는 희미합니다. 왜 ‘육지의 왕자'로서 이러한 반전투쟁에 더욱 앞장서지 않는가 싶습니다. 사실 파업을 해서 열차를 멈추는 것도 힘이지만,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투쟁을 조직하는 것도 정치적인 힘입니다. 국노가 싸우면 싸울수록 적들에게도 “국노를 그냥 두면 큰일 나겠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적들이 국노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와 지금의 국노 간부들이 자기 존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1047명투쟁을 둘러싼 4당합의도 그렇습니다. 만약 화해하고 싶다면 화해해도 됩니다. 그러나 “더 비싸게 팔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화해금이 1인당 80만 엔”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적들이 얼마나 국노의 존재를 계급적으로 보고 있는지 국노 간부들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1047명투쟁만 없어지면 자기들은 ‘연합’에 간다”라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4당합의가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노, 전동노, 동노지바를 횡단한 1047명투쟁의 대오가 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노 5.27임시대회투쟁을 둘러싸고 8명의 동지가 체포되었습니다. 또 JR동일본회사에서 JR총련과 가쿠마루 간의 결탁체제에 쐐기가 박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이제 국철분할-민영화를 둘러싼 총결산 공세가 시작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분할-민영화는 국노나 동노지바를 다 없애버리려는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살아남았다, 그리고 가쿠마루의 협력을 얻어야 분할-민영화가 가능했다는 관계도 빨리 정리하고 싶다, 하코네에서 서쪽의 가쿠마루는 잘라버렸지만, 최대의 동일본회사와 화물회사, 홋카이도회사에서 가쿠마루가 남아있는 상황을 해소해야 된다, 가쿠마루와의 유착 문제가 국회에서도 거론되고 있으니까 그런 것도 포함해서 이제 정리해야 한다'고 판단을 해서 공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노지바는 지금 “그 다음은 동노지바가 당할 것이다”며 경계하고 있습니다. 동노지바가 단결하고 있는 만큼 아직 손을 못 대지만, 동노지바의 단결이 느슨해지면 언제든지 공격해 올 것이라고 자각하면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가쿠마루와 JR회사 간의 결탁체제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니까 우리들에게 조직 확대의 큰 기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JR총련의 젊은 조합원들에게 JR총련에 소속하는 것이 이제 유리하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눈앞의 이익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국노의 어디가 문제인가

국노가 정신차리는 것이 우리의 투쟁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과제입니다. 왜 국노가 지금처럼, 누가 봐도 틀린 것을 하는 것인가를 따져봐야 됩니다.

국노는 한번도 싸우지 않았던 분할-민영화 투쟁에 대한 평가를 아직까지 전혀 못 했다
국노는 총평 최강의 조합이라고 지칭되면서도 분열-민영화에 대해 파업 한번 안 했고, 싸우지 못한 채 끝났습니다. 한번도 싸우지 못했는데도 4만여 명이나 조합원이 남았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거기에 국노의 일정한 대단함이 있는데요. 집행부가 아무런 방침도 내지 않았지만 조합원들이 차별과 선별에 맞서 “그래도 나는 국노다”며 4만여 명이나 남았던 것입니다. 이런 조합은 어디를 봐도 없습니다. 이는 본부가 잘한 것이 아니라 현장이 잘한 것입니다. 그래도 한번도 싸우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후 일본 노동운동의 견인차라고 지칭되던 국노가 왜 분할-민영화 공격에 대하여 한 번도 싸우지 못했는가. 이에 대해 국노본부가 아직 짚어보지 않았습니다. 국노를 지도하는 협회파와 혁동-일본공산당도 아직 짚어보지 못했습니다. 짚어보지 못했으니까 지금도 같은 잘못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86년 슈젠지 대회 (노사공동선언을 둘러싼 분열) 이후도 무방침
두 번째로, 동노지바가 두 차례 파업을 한 뒤, 86년 10월 슈젠지에서 국노 대의원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롯본기 위원장 체제가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이 집행부 역시 아무 투쟁 방침도 내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방침이 채용차별사건의 관련된 노동위원회 투쟁 뿐. 새로 JR자본과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는 방침이 전혀 없었습니다. 간신히 “분할민영화 반대 깃발을 내리지 않는다. 노사공동선언에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투쟁 방침이 형성되지 않은 채, 철산노를 만든 부분이 빠져 나가서 조합원 수가 격감하는 사태를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JR회사 출범 이후에도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사건을 제기해서 채용차별 사건의 노동위원회 투쟁을 시작하겠다는 것이 유일한 방침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각 JR회사가 노동위원회 출석을 아예 거부했습니다. 노동위원회에서 심문이 조합 측 주장만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제기한 지 2년만에 지노위는 모든 사건에 대해 조합 측 승리 명령을 냈습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전면일괄해결 요구’ 노선
그리고 89년 6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전면일괄해결 요구’라는 방침이 결정되었습니다. 중앙노동위원회의 자리에서 채용차별사건이나 202억엔 손배 등, 모든 문제를 일괄해서 해결하자는 요구입니다. 화해란 것은 서로가 양보해야 화해인데, 그 당시 국노에게는 화해의 마지막 카드가 “지방노동위원회에서 국노 측 승리명령을 쟁취했다”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국노는 중앙노동위원회에서의 승리 명령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중노위 명령이 나오면 화해를 못 하게 되니까 명령이 나오면 곤란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국노의 방침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이 방침이 있기 때문에 국노해고자투쟁단을 포함해서 다 화해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노위가 반동적인 명령을 내렸으니까 중노위 자리에서 화해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음은 정치해결노선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98년 5월28일 도쿄지법이 반동적인 판결을 내서 투쟁단 측이 졌습니다. 그렇게 되자 더욱 더 정치해결노선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이 노선의 근거가 89년 6월 임시전국대의원대회의 ‘전면일괄해결 요구’ 방침입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조합은 멋으로 대회를 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투쟁방침을 확립할 것인가를 철저히 논의해서 결정합니다. 그리고 노동조합인 이상은 거기서 결정된 방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대회에서 결정된 방침이 화해노선, 정치해결 노선이기 때문에 JR자본과 싸운다는 가장 중요한 방침이 안 나옵니다. 처음부터 화해한다는 자세로는 화해 상대방과 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JR자본이 어떤 공격을 가해 와도 전혀 싸우지 않습니다. 국노는 그동안 JR자본으로부터 온갖 공격을 받으면서도 전혀 투쟁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것을 제대로 짚어봐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특히 국노 조합원들에게 호소하고 싶습니다.
JR자본과 싸우지 않고는 해고철회와 JR복직을 쟁취할 수 없습니다. 특히 JR동일본회사는 자본과 가쿠마루의 결탁 체제이기 때문에 이 결탁체제와 싸우지 않는 한 JR복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국노가 16년 동안 동노지바와 같은 입장에 서서 JR자본과 집요하게 투쟁했더라면 더 많은 신규채용 청년 노동자들이 국노에 들어가서 조직도 확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조합 대회에 스스로 경찰기동대를 부르거나 그런 것만 하니까 양심적인 국노 조합원일수록 염증이 나서 탈퇴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지바에서는 국노 조합원들이 국노본부에 절망해 동노지바에 오고 있습니다. 조합 자세가 문제입니다.
4당합의가 무산된 후 4당합의 반대파도 어찌 보면 망연자실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들 역시 정치해결노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동운동이라 정치해결도 화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합이 단결을 강화해서 싸워서 자본과 정부가 곤란해졌을 때야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미리 방침화하면 한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을 국노는 전형적으로 했습니다. 국노 이외의 노동자는 이러한 자세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됩니다. “이러한 짓을 하면 비참해진다”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지금 챌린지그룹이 국노 재산을 빼앗고 국노를 해체해서 ‘연합’화하는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벌써 일부에서 탈퇴 움직임이 있습니다. 2002년 11월 국노 전국대회에서는 파업기금 유용 건이 의제가 되었습니다. 파업기금이란 파업을 했을 때 임금절하를 보전하기 위해 적립한 것으로 그 이외의 용도로는 쓰지 못한다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각 지역본부에 분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한차례 대회만으로 결정할 수 없고 1년 동안 현장토의에 걸기로 되었지만, 이번 전국대회에서 결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파업기금을 각 지역마다 분할한 다음에 “그럼 안녕”이라며 국노에서 도망치려는 움직임이 틀림없이 시작될 것입니다. 다음 대회가 승부를 가립니다.
JR자본과 JR총련 가쿠마루의 결탁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게다가 가쿠마루 내부에서도 분열이 생기고 있습니다. JR동일본회사에서 자본 측은, 가쿠마루가 장악하고 있는 JR총련이라는 5만명의 조합을 활용해서 노무정책을 벌여 왔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야 합리화 공격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결탁체제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국노 입장에서는 기회가 왔다는 것입니다. 국노가,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서 JR자본과의 투쟁을 핵심으로 두고 해고철회 투쟁에 나선다면 대단히 큰 기회가 생길 수 있습니다.
국노 도쿄지방본부와 국노본부가 국노 조합원들을 경찰에 팔아넘긴 국노 5.27임시대회투쟁 탄압사건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관련해서 ‘국노 5.27임대투쟁탄압을 허용하지 않는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국노 내외로 확산시키면서 국노 해체를 노리는 챌린지그룹과 공산당?혁동의 집행부를 타도하고 전투적 투쟁단이 중심으로 된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투쟁단이 벌써 10여 년 동안 투쟁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 왔습니다. 지금의 본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집행부는 없는 것이 낫습니다. 저는 지금의 국노가 그대로 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 국노대회는 좌파가 버티면 분열도 가능한 대회가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서 싸워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급적 힘관계 전복에 앞장 서자
필요한 것은 계급적 힘관계를 전체적으로 바꾸어나가는 것입니다. 이 선봉에 국노가 서야 됩니다. 우선 JR자본과의 투쟁을 강화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잇따라 짓밟는 공격에 맞서는 투쟁에 앞장서야 됩니다. 전쟁과 전쟁법안의 격렬한 진전과 정면으로 맞서는 투쟁의 맨 앞에 국노 깃발이 우뚝 솟아야 됩니다. 이러한 투쟁에 뭉쳐서 나서 국철분할-민영화 이후 많은 후퇴를 강요받아 온 일본의 노동운동, 일본 계급투쟁의 반격을 이루어야 됩니다. 이 선봉에 국노가 나서야 됩니다. 이와 결합해야지만 1047명투쟁이 승리할 전망도 열리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시급히 필요한 것은 4당합의에 사로잡힌 국노본부 집행부를 타도하고 4당합의 반대파까지 빠져 있는 전망상실 상태를 넘어 국노의 ‘해체적 재생’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국철-JR 노동운동의 새로운 재편과 유동 상황이 다가오는 가운데 기회는 곳곳에 있습니다.
기회와 위기는 반드시 표리를 이루기 마련입니다. 기회를 올바로 투쟁에 살릴 수 있으면 기회가 되지만 기회를 못 살리면 위기로 바뀔 것입니다. 기회를 참으로 살릴 수 있는 투쟁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먹여 살릴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동시에 전쟁 없이 자본주의체제가 연명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전세계에서, 분노하는 노동자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천만이라는 규모로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중동에서도 시작되었습니다. 이 투쟁과 일본이 무관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그러한 투쟁을 실현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합니다. 그 핵심에 국철투쟁이 자리 잡아야 됩니다. 노동자가 일어나는 조건이 여기저기서 분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앞으로도 동노지바는 투쟁해 나가자고 합니다.
분할-민영화 이후 16년 동노지바도 여러가지 일들을 배웠고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이를 살리면서 현장의 단결, 조직의 강화 확대를 핵심에 두고 일본의 많은 노동조합의 모범이 될만한 투쟁을 펼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끝)

국철지바동력차노동조합(DORO-CHI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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