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노치바 투쟁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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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노치바 투쟁의 궤적

1. 동노치바 결성 이전의 투쟁

전사(前史)
1978년2월
조역기관사 선로견습 저지투쟁

(1) 동노치바의 전신이 국철동력차노동조합(1950년 기관차노동조합으로 결성되었고 1957년 명칭 변경)의 치바 지방본부이었다.

(2) 결성 애초 결코 전투적인 노동조합이 아니었다가 60년 안보투쟁(일미안보반대)과 62-63년 미카와시마-주루미 철도사고(320여명의 사망자를 냄)에 대한 분노, 기관조수 폐지-5만여 명 합리화 반대투쟁, 베트남전쟁 반대-70년 안보-오키나와투쟁, 그리고 같은 시기 몰아쳤던 “생산성 향상 운동”을 명분으로 한 극심한 조합와해공세(불과 2년 동안 동노와 국노<국철노동조합> 조합원이 6만여 명이나 감원되었음)와 싸우다가 승리한 경험을 통해 오늘날의 기초가 조성됐다.

(3) 또 동노 치바 지본(지방본부)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두개 투쟁이 있었다.
하나는, 합리화와 감원으로 열차 안전운행이 항상적으로 위협받았던 직장 상황에 관련한 투쟁이다. 72년 치바현 후나바시역에서 열차 충돌사고가 생겨 조합원이 체포당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자본의 이익 챙기기로 안전성 확보가 허술하게 된 결과 생긴 사고다”는 입장에서 여러 차례 파업과 감속투쟁을 벌였고 조합원 해고를 막아 복직을 얻어냈다. 이후 “투쟁 없이 안전 없다”가 우리의 가장 핵심적인 슬로건이 되었다.
또 하나는, 군사공항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버려 온 나리타(산리즈카)공항반대투쟁과의 연대다. (나리타 또한 치바현에 위치함.) 산리즈카투쟁이 일본의 전후 최대 농민투쟁이자 반권력투쟁이다. 우리는, 공항 개항을 강행하려던 국가권력의 극심한 탄압이 반대파 농민에게 가해지는 상황에서 노-농 연대를 내세워 1977-78년 제트연료 공항수송을 거부하는 “100일 투쟁”을 벌여냈다.

2. 신생 동노치바 결성

1979년3월30일
동노치바 결성대회

(1) 이러한 투쟁 속에서 동노치바지본이 조직과 단결을 강화시키며 동노 내부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민주적인 지방본부로 되어 갔다. 반면 동노본부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변질을 심화시켰다. 1978년 전국대회에서 △파업투쟁 포기 △나리타공항 반대파농민과의 연대투쟁 중단 등 엄청난 방침을 제기했고 이를 반대하던 치바지본 참석자들을 로비에서 폭행해 발언을 금지했다.

(2)그리하여 동노본부가 1979년3월 투쟁포기 방침을 거부한 치바지본 전체 집행부의 집행권과 조합원권을 정지시켰고, 게다가 위원장 이하 4명의 집행부 제명을 강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9년3월30일 우리는 동노본부로부터 분리 독립하기로 결정했고 동노치바를 결성했다.

(3) 이후 2년 가까이 국철당국 공인 속에서 동노본부가 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직장습격을 일삼았다. 많은 부상자를 냈지만 단결을 지켜내는 투쟁이 시작되었다.
국철당국 또한 1979년12월 서기장(사무국장)을 해고, 1980년5월 조직부장 해고, 1981년에는 3월2일부터 6일까지 계속된 파업(나리타공항 제트연료 화차수송 저지-6만명 감원반대)을 이유로 부위원장 등 4명의 조합임원을 해고하는 등 극심한 조직파괴 공세를 가했다.

3.국철분할민영화 반대투쟁

1985년11월17일
국철분할민영화 저지!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파업돌입 선언

(1) 동노치바 투쟁사 속에서 가장 극심한 공방전이 국철분할민영화-10만명 해고 반대투쟁이었다.
나카소네 내각이 1983년 국철 분할민영화 방침을 제기한 이후 회오리처럼 조합파괴공세가 몰아쳤다.
국철 최대 조합이었던 국노가 1983년부터, 민영화가 강행된 1987년까지 불과 4년 동안에 조합원수 22만4천명이 4만4천명까지 줄어들었다. 또 같은 기간 13만여 명의 국철노동자가 직장에서 쫓겨났다. 이러한 사실들이 이 공세가 얼마였는지 말해주고 있다.
또 나카소네 수상은 국철노동운동을 해체시킴으로써 총평(전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을 해체시키는 것이 국철민영화의 목적이었다고 후일 공언했다. 이 국철분할민영화가 10만여 명의 국철노동자를 해고시켜 이들 권리를 빼앗을 뿐 아니라 전체 노동운동을 해체하려 준비된 국가적 부당노동행위였던 것이다.

(2) 극심한 공세 속에서 국철 내 노동조합들의 대응이 갈라졌다. 즉 민영화 반대; 동노치바, 국노(국철노동조합), 전동노(全動勞)와 민영화 추진; 동노본부, 철노(鐵勞) 등 2가지였다. 특히 동노본부가 조합해체를 저지른 최악의 앞잡이가 되었다. (민영화를 추진했던 조합들이 이후 해산 통합되면서 현재 JR총련이 되었다.)
국철분할 민영화를 반대했던 국노 또한 1986년 대회에서 민영화에 타협하는 방침을 제기해 결정했다가 조합원들의 거센 분노 목소리로 3개월만의 임시대회에서 이 타협방침이 번복되기도 했다. 본부가 흔들리는 속에서 조합 탈퇴자가 잇따라 조직분열로 투쟁을 대치할 수 없었다.

(3) 우리는 국철분할민영화 저지 투쟁이 모든 노동자의 미래와 노동운동의 존망이 걸린 투쟁임을 호소하며 가족을 포함해서 토론을 거듭한 결과 1985년11월 1차 파업, 1986년2월 2차 파업을 핵심으로 한 총력적인 투쟁에 나섰다.
이 투쟁이 전국 차원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는 의도적인 정부발표와 언론보도가 감추어 왔던 국철분할민영화의 본질을 이 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사회 이슈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공세가 애초부터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정동노 강도 높은 것이었지만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을 관철해야 조합원 단결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입장이었다.
공권력이 파업 거점직장을 1만여 명의 기동대(전경)로 포위하는 탄압태세를 쳤다. 반면 국철당국이 1차 파업과 2차 파업을 이유로 각각 20명, 8명의 조합원을 해고시켰다. 심지어 이 파업에 관련해서 한 3천만엔에 이르는 손배소송을 제기하는 등 유례없이 강도 높은 공세에 나섰다. 또 1987년 분할민영화가 강행됐을 때만 해도 그 이전의 파업으로 정직처분을 당했다는 이유로 새 회사인 JR가 12명의 조합원들을 채용 거부했다.
그러나 우리는 의연한 투쟁으로 단결을 유지한 채 JR에 성공적으로 들어갔고 계속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 파업이 국철분할민영화 반대를 내세워 벌였던 국철노동자의 유일한 파업이었다.

4. JR에서 새로운 투쟁 시작


1989년4월13일
장기 파상파업
4.13 마쿠하리 거점 파업

(1) JR에서 새로운 투쟁이 다음 4가지 과제를 내세워 시작되었다.
1. 국철분할민영화 때 해고된 동지들의 해고철회투쟁
2. 조합원들의 대량 강제전보와 거점직장 폐지 등 극심한 조합파괴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
3. 극한적인 감원 때문에 황폐된 직장에서의 합리화반대 및 열차안전운행 확보 투쟁
4. 국철민영화와 더불어 진행된 정치반동과 군사대국화를 반대하며 노동운동 회생을 위한 투쟁.

(2) JR 직장 투쟁: JR가 조합해체를 위해 기관사들을 역내 매점과 간이음식점으로 강제 전보했지만 1988년5월 이 조합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단속적인 파업으로 JR직장투쟁이 시작되었다. 조합해체 분쇄투쟁은 다음과 같은 투쟁을 초점으로 영속적으로 벌이고 있다. △1995년 당시 우리의 거점직장이었던 가쭈우라 운전구(運轉區)를 폐지하려던 움직임에 대해 72시간 파업 △조합해체를 막기기 위해 1996년 이후 항상적인 파업체제 수립 △1997년 사쿠라 기관구 폐지 분쇄 투쟁 등을

(3)해고철회투쟁: 1990년1-3월의 파업을 시작으로 매년 같은 파업, 대중적 항의행동, 노동위원회투쟁과 재판투쟁을 벌이던 과정에서 1997년 큰 승리를 얻어냈다. 국철분할 민영화 저지 1차 2차 파업의 보복으로 해고된 28명 모두가 해고철회를 쟁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JR동일본회사에서 이 과정에서도 강도 높이 나섰다. 1990년3월18일부터 21일까지 벌이던 파업 때 말이다. 회사가 조합사무실을 원천봉쇄한데 대해 우리가 항의해서 파업 돌입을 예정보다 앞당기자 그것을 “위법파업”으로 규정해 조합에 2천만여엔 손해배상을 제기하기도 했다.
국철민영화 강행 때 새 회사인 JR에서 채용을 거부한 바람에 해고된 조합원 (동노치바, 국노, 전동노) 1047명가 해고철회투쟁을 지금도 계속 벌이고 있다.

(4)합리화 반대와 열차안전운해 확보 투쟁: 1988년12월 열차가 충돌되고 기관사가 사망한 사고가 생겼다. (JR가 수송 차질을 꺼려 정지신호를 무시하라는 위법적인 지시를 한데 원인이 있음.) 이 사건 1주년을 맞아 벌였던 항의파업을 시작으로 1991년 기관사 노동강화 반대투쟁, 매년 실시되는 운행시각표 개정에 따른 노동 강화를 막기 위한 투쟁, 차량검사수선업무의 전면적 외주화(외부위탁) 기도를 계속 저기하고 있는 2002-03년 파업 등 오늘에 이르기까지 투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 JR에서는 관리부문과 기관사를 제외하고 다부분의 업무를 외주화함으로써 노동자의 고용과 임금, 단결을 파괴하려고 강도 높이 나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제2 분할민영화 공세”로 규정해 총력투쟁을 펼쳐 2002년-03년 총 8일간 파업과 직장에서의 비협력투쟁에 나섰다. 이에 따라 우리가 조직하는 직장에서는 차량검사수선업무를 완전히 막고 있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지난 10월5-6일 열린 32차 정기대회에서는 언제든지 파업을 포함한 투쟁에 나설 수 있는 투쟁체제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회사에서 차량검사수선기지 통폐합, 임금제도 발본개악 등 또 다른 대형합리화 제안이 있었고, 민영화에 따른 중대사고 속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5) 또 우리는 전쟁과 군사대국화, 고용과 임금 권리 사회보장제도 파괴를 반대하한 한편 노동운동 회생을 위한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1989년 총평(일본동조합총평의회) 해체 이후 노동운동 내셔널센터가 정부 자본과 함께하는 반동적 조직으로 변질된 상황에서 전국 차원에서 호소하해서 노동운동 회생을 위한 노조할동가 조직을 결성했다. 1991년 들어 만안전쟁(gulf war)를 한 계기로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반전공동행동위원회”를 결성했다. 또 1998년 들어 칸나마 (전일본건설운수연대노동조합 칸사이 레미콘 지부)와 미나토합동 (전국금속기계노동조합 미나토합동) 등 현재 가장 원칙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벌이고 있는 2개 노동조합과 함께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전국네트워크” 창조를 제기하고 있다.

(6)특히 지난 2003년 3월20일 이라크전쟁 시작과 일본의 유사입법(전쟁을 위한 기본법이자 국가총동원법) 제정을 위한 급속한 움직임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반면 그동간의 국제적인 이라크반쟁투쟁 고조는 우리에 큰 용기를 주었다.
동노치바가 이라크전쟁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인 2003년3월27일 세계 노동자와 연대하는 뜻으로 이라크전쟁 반대, 유사입법 제정 저지, 노동법제 개악(모든 노동자를 비정규직화시켜 해고의 자유를 법제화하려는 것) 저지를 내세워 파업에 돌입했다. 30일까지 나흘 동안 90시간에 걸친 파업을 관철해서 600개 열차를 멈추었다.
이 파업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전망을 열어놓았다. 인터넷 등을 통해 이 투쟁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고 ILWU(국제항만창고노동조합) Local 10과 샌프란시스코노동자평의회 등 미국 노동운동과의 교류와 국제연대가 성사된 것이다.
또 일본에서 그동안 이라크전쟁반대-유사입법제정반대 투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육.해.공.항만노조 20개 단체“와 ”막아내자 전쟁 길! 100만명 서명운동“ 등과 함께 전쟁저지를 위한 광범위한 투쟁을 마련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다.

(7)지금 우리는 국회의원의 90%가 찬성했다는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6월 유사입법이 성립된 중대 사태에 직면되고 있다.
또 국회에서는 노동법제 발본개악과 이라크 자위대파병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심지어 9원 출범한 2차 코이주미 내각이 극우각료가 늘어서는 “전쟁수행-개헌내각”이 되었다.
또 이러한 상황에서 “납지문제”를 빌미로 한 배외주의 선전이 봇물 같이 조직화되었고 북조선 침략전쟁이 준비되고 있다.
반면 야당 제1당인 민주당 또한 유사입법제정과 노동법제개악을 찬성했고 자유당과의 합당(자민당 최우파가 분열돼서 이루어짐)을 통해 자민당과 한 치도 다름없는 거국일치정당으로 돼가고 있다. 이러한 상화에서 11월 총선이 전후 초유의 “익찬선거”가 될 우려가 있다.

(8)우리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형실업과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일본에서 계급적 노동운동을 회생함으로써 “유사입법을 완성시키지 않는다, 발동시키지 않는다, 따르지 않는다”는 투쟁을 전국규모로 펼칠 것이다. 우리는 이라크 자위대파병과 북조선 침략전쟁을 저지하기 위한,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 생존권 박탈을 저지하기 위한 큰 발판을 마련하려는 차원에서 11월9일 일.한.미 노동자 국제연대집회를 쟁취할 것을 전국 노동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5. 해고철회를 둘러싼 새로운 상황

1997년3월27일
공노법 해고 28명 모두 해고철회 따냈다
24차 동노차바 임시대회

(1)지금까지 16년 동안 계속 투쟁해 온 해고철회투쟁이 새롭고 어려운 상화에 처해 있다. 해고철회투쟁을 함께 하는 동지인 줄 알았던 국노 본부임원들이 투쟁의 장기화와 어려움에 굴복해서 급속히 변질되고 있다.

(2)일의 발단이 정부와 자민당을 핵심으로 한 4당이다. 여야 4당이 “JR에 해고의 법적책임이 없다는 것을 국노가 대회결정을 통해 인정해서 재판을 취소하면 JR가 대화하도록 정부가 요청하겠다”는 제안을 국노에 한 것이다. 이에 국노 본부는 조합원들에 거센 반발을 짓밟으며 제안 수용을 대회에서 결정해 벌였다.
그런데 정부.자민당이 이번에는 이 대회결정을 따르지 않고 해고철회투쟁을 그만두지 않으려 하는 조합원들을 제명하라고 요구해왔다. 국노 본부는 그것까지도 받아들여 9월 전국대회에서 본부 방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고된 조합원 22명을 통제처분했다.
게다가 작년 5월 국노 임시대회에 관련해서 엄청난 사태가 생겼다. 투쟁을 계속하라고 대회 대의원에게 호소하며 본부 방침을 항의했던 조합원들을 본부가 비디오 찰영해서 경찰에 팔아넘겼다. 이 때문에 7명의 국노 조합원과 1명의 지원 노동자가 부당 체포당했고 1년 넘게 구속된 상태이다.

우리는 지금 공권력의 전대미문의 조작 부당체포를 규탄하여 동지들을 되찾기 위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 동지들이 2003년12월22일 보석
으로 구치소에서 풀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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